TSN Lab blog

한달 휴가, 한달 워케이션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서 근무하던 때 였습니다. 당시 제가 맡고있던 프로젝트는 가상화를 지원하는 네트워크 운영체제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연구원에서 누구도 가본적 없는 길을 가야 했고, 프로젝트가 상당히 지연되고 있어서 말 그대로 영혼을 갈아 넣었습니다. 아침 7시에 출근해 그 다음날 새벽1~2시쯤 퇴근하는 일상을 몇개월간 반복했습니다. 중간보고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저는 9시 출근 6시 퇴근의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문제는 그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당연하게 업무 효율도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몇 개월 간 성공을 위해 몸과 마음을 갈아 넣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회복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단기 성과를 달성한 이익에 비해 그 뒤에 따라온 후유증의 대가가 훨씬 컸습니다.

몸과 마음을 회복한 뒤로는 9시부터 6시까지 집중해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초 집중상태로 일하면 5시쯤 집중력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금요일쯤 되면 일 하기 싫어집니다. IT 분야에서 대부분의 성과는 하루 4~5시간 사이에 만들어집니다.

SW를 개발하는 작업, 반도체를 설계하는 작업은 단기간에 엄청난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입니다. 하루 24시간 중 그 일에 쓸 수 있는 시간은 많아야 4~5시간 정도입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소진되기 전에 적당히 쉬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래 꾸준히 일 할 수 있습니다.

TSN Lab을 창업할 때 1년 중 1개월은 통으로 쉴 수 있는 회사를 생각했습니다. 업무일수 기준 20일이면 한달을 통으로 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연차 구분 없이 모든 임직원이 20일 휴가를 쓸 수 있도록 했습니다. 신입 직원 입장에선 다른 회사가 15일 휴가를 주는데 비해 5일 더 많은 휴가를 쓸 수 있습니다. 3년 간의 통계를 보면 대부분 주말 여행을 위해 금요일에 휴가를 내거나, 연휴 앞뒤로 붙여 쓰는 우가 많았습니다.

워케이션

Work + vacation = Workation. 개념은 사무실이 아닌 휴가지에서 일 하는 것입니다. TSN Lab은 재택근무가 기본 시스템이기 때문에 워케이션이 굉장히 쉽습니다. 저희 회사의 워케이션 규정은 이렇습니다.

  • 인터넷이 원활한 장소
  •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 확보
  • 워케이션 기간 중엔 근무 시간을 자유롭게 조정 가능
  • 워케이션과 휴가를 섞어서 3시간 일 + 5시간 휴가와 같이 조합하는 것도 가능
  • 워케이션 기간 중 숙소비 명목으로 1일 5만원 재정 지원

2022년 9월 1일 강릉 워케이션 2022년 9월 1일 강릉 워케이션

직원들이 엄청 좋아할 줄 알았는데, 막상 워케이션 제도를 시행하고 보니 그리 인기가 없었습니다. 시행 첫 해는 2명, 둘째 해는 4명이 워케이션을 다녀왔습니다. 전 직원의 20 ~ 25% 정도밖에 안 되는 비율입니다. (휴가는 전직원 100% 활용) 워케이션을 가는 이유와 안 가는 이유를 물었더니 워케이션의 장/단점이 명확해졌습니다.

아래는 워케이션을 가는 이유 입니다.

  • 가족 여행을 가고 싶은데 휴가가 모자란 경우
  • 해외 여행을 하고 싶은데 휴가가 모자란 경우
  • 여행 가도 하루종일 노는 건 아니니까 일부 오전에 일, 오후엔 휴가로 활용

아래는 워케이션을 안 가는 이유 입니다.

  • 워케이션 가 봐야 일 하는건데 집이 편함
  • 휴가가 넉넉해서 굳이 휴가지에서 일 할 필요 없음

가족이 있거나 여행을 좋아하는 경우 워케이션을 적극 활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에 집돌이 집순이들은 워케이션은 별로 매력이 없는 제도입니다.

업무 성과

저희 회사는 대부분 정시출근 정시퇴근을 하고 20일 휴가 20일 워케이션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회사에 비해 쉴 수 있는 시간이 많습니다. 경영자 입장에서 많이 쉬면 업무 성과가 떨어지지 않을까 염려 될거라 생각됩니다. 저도 그 고민을 가장 많이 했었거든요. 답을 먼저 말씀드리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쉬는 시간이 많아졌을 때 여러 부류로 갈립니다.

  • 하루 8시간동안 생산량이 높아지고 그 생산량은 휴가/워케이션으로 떨어지는 생산량보다 높습니다. -> 전체의 20% 정도 (A)
  • 하루 8시간 동안 생산량이 높아지고 그 생산량은 휴가/워케이션을 떨어지는 생산량을 어느정도 보완합니다. -> 전체의 60% 정도 (B)
  • 쉰 만큼 생산량이 낮아집니다. -> 전체의 10% 정도 (C)
  • 휴가/워케이션을 악용해 회사에 피해를 끼칩니다. -> 전체의 10% 정도 (D)

한달 휴가와 한달 워케이션을 시행하면 전체 인원의 80%는 생산량이 떨어지지 않고(A + B), 상위 20%(A)는 오히려 생산량이 더 올라갑니다. 하위 20%(C + D)는 쉬는 만큼 생산량이 낮아집니다.

A의 경우 연봉 협상 때 연봉 인상을 많이 합니다. B도 해마다 연봉이 조금씩 오릅니다. C는 연봉 협상 시 동결하거나 감액합니다. D는 퇴출 대상입니다.

쉬는 시간이 많아졌을 때 그 시간을 잘 활용하는 사람과 잘 못 사용하거나 심지어 그 시간을 악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국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사람들은 쉼이 늘어날 때 그 시간을 자신의 실력을 높이고 기술을 갈고 닦는데 활용하고, 자기 관리를 못 하는 사람들은 그 시간을 자기 계발에 활용하지 않습니다. 한달 휴가, 한달 워케이션은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제도입니다. 그리고 회사는 결국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엔 주 4일제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주 4일은 일 주일에 5일을 일하는 것이 아니라 4일만 일 하는 제도입니다.